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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놈들 길들이기
독자놈들 길들이기 - 박남철
내 詩에 대하여 의아해하는 구시대의 독자놈들에게 차렷, 열중 쉬엇, 차렷, 이 좆만한 놈들이 ……
차렷, 열중 쉬엇, 차렷, 열중쉬엇, 정신차렷, 차렷, ㅇㅇ, 차렷, 헤쳐모엿!
이 좆만 한 놈들이 ……
헤쳐모엿,
(야 이 좆만한 놈들아, 느네들 정말 그 따위로들밖에 정신 못차리겠어, 엉?)
차렷, 열중쉬엇, 차렷, 열중쉬엇, 차렷 ……

※해설
- 80년대 초의 국내 현실을 풍자한 시이다.
- 군사 문화에 대해 무비판적인 국민을 일깨우고 있다.
- 박남철의 이런 시는 해체시 혹은 형태 파괴시로 일컬어졌다.
- 전통 서정시에 대한 부정의 뜻이 담겨 있다.
이런걸 보면 문학이든 예술이든간에..문화는 평가의 대상이 될 지언정 비난의 대상은 될수 없는거 같다.

50년 후에 미술책에 김성모 만화가 실리지 말란 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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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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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eli
  2007.04.03 22:19 신고 | link | edit or delete | write reply 
국어듣기평가에..
마르쥬
  2007.04.05 13:47 신고 | link | edit or delete | write reply 
이런건 보이스웨어를 추가해줘야 딱인듯
  2007.04.07 06:51 신고 | link | edit or delete | write reply 
박남철 시를 이거랑 주기도문 딱 두개만 봤는데, 멋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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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site

그냥 축구 보다가 생각난 사건들...
생각나서 정리해 봄...


1950년 브라질 월드컵
축구 강국 잉글랜드가 미국에 0-1로 졌다. 그러나 잉글랜드 언론들은 자국팀이 미국에 졌을 리 없다고 믿었다. 기록이 거꾸로 기재됐다고 믿은 그들은 1-0으로 승리했다고 오보를 날렸다.

미국 언론은 더 한심했다. 그렇게 적은 점수 차로 진 것이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0'이 하나 빠졌을 거라고 여겨 뉴욕 타임스는 미국의 10-0 대패로 보도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8강전
브라질-헝가리전에서 브라질 선수가 선취골을 넣은 헝가리 선수의 바지를 벗기는 사건이 있었다. 경기 내내 난투극이 벌어졌고 브라질 선수들은 경기 후 병을 들고 헝가리 라커에 침입하기도 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69년)
1.
엘살바도르와 온두라스는 본선 진출 티켓을 놓고 북중미 최종예선 A조에서 맞붙는다. 결과는 엘살바도르의 승리. 그러나 양국은 2천명이 넘는 희생자를 낸 5일전쟁이 불가피했다. 전쟁의 싹은 2차전이 끝난 뒤 움텄다. 69년6월8일 온두라스의 수도 테구시갈파에서 열린 1차전에서 0-1로 엘살바도르는 패했다. 온두라스 국민들이 엘살바도로 선수단 숙소를 둘러싸고 소음공해를 유발, 엘살바도르팀은 뜬눈으로 밤을 세웠기 때문이다. 1주일 뒤 자국의 수도 산살바도르로 옮겨 열린 2차전에서는 3-0으로 크게 이긴다. 엘살바도로 국민들도 똑같이 온두라스 팀에 '잠 안 재우기' 고문(?)을 했던 것.

그러나 2차전에서 비극의 서곡이 울린다.원정응원을 온 온두라스인들이 엘살바도르의 텃세판정에 항의하다 두들겨맞고 쫓겨나고 만 것. 구타 소식은 단숨에 온두라스 전역으로 퍼졌고, 흥분한 온두라스 국민은 그날밤 보복에 나선다. 수도 테구시갈파에 있는 엘살바도르인의 집을 습격해 방화와 약탈을 저질렀고 거리를 휩쓸고 다니며 엘살바도르사람만 만나면 무자비한 린치를 가했다.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희생자가 속출했고 엘살바도르는 세계인권위원회에 온두라스를 고발했다. 온두라스는 엘살바도르 상품의 수입금지로 맞대응했고 감정의 골이 깊어진 양국은 마침내 국교를 단절하고 만다.

긴장이 한껏 고조된 가운데 두 팀은 6월27일 멕시코시티에서 마지막 승부인 3차전을 치른다. 관중보다 경찰이 더 많을 만큼 살벌한 분위기에서 펼쳐진 이 경기서 두팀은 전·후반을 2-2로 비겼으나 연장전에서 엘살바도르의 로드리게스가 결승골을 터뜨린다.엘살바도르는 승리의 환희에 젖었지만 온두라스에서 희생된 자국국민을 결코 잊을 수 없다며 7월13일 온두라스에 선전포고를 한다.야포와 전차·고물 전투기를 총동원한 전면전은 5일만에 엘살바도르가 온두라스의 항복을 받아내 막을 내리지만 양국에서 2천명이 넘는 귀중한 생명을 앗아가고 말았다.

2.
1970년 6월 7일 멕시코 아즈테카 스타디움. 10만3000여 관중이 만원을 이룬 가운데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선혈을 내뿜으며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월드컵 사상 가장 어처구니없는 골이 비극의 원인이었다. 멕시코의 상대국은 엘살바도르. 전반 44분. 엘살바도르가 얻어낸 프리킥을 갑자기 멕시코 선수가 걷어찼고, 공은 엘살바도르의 골문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집트인 주심 알리 칸딜은 이를 적법한 멕시코의 골이라고 인정했다. 경기를 거부하다 우여곡절 끝에 경기장으로 돌아온 엘살바도르 선수단은 후반전에서 무력하게 무너지며 0-4로 패퇴했다. 경기장 안팎 4만 군중의 움직임이 폭동으로 번져 가려는 찰나, “우리가 실력으로 승리한 것” “심판이 봐 줘서 이겼다”라는 두 멕시코인의 말다툼이 권총 결투로까지 내달았다. 갑자기 생긴 멕시코인 희생자 때문일까. 다행히 엘살바도르 관중의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1974년 서독 월드컵
당시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를 월드컵에 진출시킨 유고 출신의 비디니치 감독은 자이르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본선 조별 리그에서 자이르와 비디니치 감독의 모국인 유고가 한 조가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자이르의 모부투 대통령은 비디니치가 일부러 유고에 질 것으로 의심했다. 그는 체육부 장관에게 감독대행을 지시했다. 자이르는 0-9로 대패했다. 장관은 경기 후 사임했고 감독도 대회 후 잘렸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
1982년 6월 16일에는 난데없는 수탉의 피가 중계방송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다. 잉글랜드 관중이 프랑스 축구대표팀의 상징인 수탉을 즉석에서 죽여 프랑스 골문 뒤쪽에다 집어던진 것.


1994년 미국 월드컵
1.
미국대 콜룸비아 전에서 자책골을 넣은 콜롬비아 수비수 에스코바르는 귀국 후 4인조 강도에게 무려 12발의 총알 세례를 받고 숨졌다.

2.
당시 브라질의 골게터 호마리우는 아버지가 강도에게 납치당하자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으면 월드컵에 나가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강도들은 즉시 호마리우의 아버지를 풀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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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책에서 보고 그냥 피식거리고 말았는데, 막상 소개할려니 자세히 쓸 자신이 없어서 그냥 기사문 좀 복사해서 편집했습니다.
기사문 출처는 http://www.joins.com/sports/

그리고 재밌는 사진 하나.



위 사진은 한국시간으로 6월 19일 새벽, 프랑스와의 경기를 마치고 퇴장하는 한국 축구 대표팀의 모습입니다만. 어딘가 어색한 부분이 있습니다. 찾아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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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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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6.20 10:34 신고 | link | edit or delete | write reply 
베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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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site

우리가 산다는것
인생은 짧다.
그런데 그 짧은 인생을
숱한 고생, 숱한 술책, 숱한 낭비때문에
망쳐 버리고 괴로운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얼마간의 즐거운 시간
얼마간의 따뜻한 여름날
얼마간의 따듯한 여름 밤이나마
마음껏 마시고, 마음껏 맛보고 싶다.

-헤르만 헤세의 (우리가 산다는것은) 중에서

멀리 있을 짧은 안식을 위해 오늘 하루를 희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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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rste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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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nta
  2004.05.20 20:56 신고 | link | edit or delete | write reply 
입으로 손으로 펜으로 키보드론 뭐든 할 수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네요

나름대로 고민하지 않겠다고 깝치지만 결국 빛을 보는게 두려워 어둠으로 걸어가는게 아닌가 싶네요.. 정말 고삼이 되니 19년 삶에 대한 진지한 후회가 으..
  2004.05.20 22:16 신고 | link | edit or delete | write reply 
인생은 짧구나
사랑하라 소녀여
  2004.05.20 22:27 신고 | link | edit or delete | write reply 
공수래공수거, 짧은 인생 여유롭게 즐기면서...음악 듣기좋네요
나이시스
  2004.05.21 00:23 신고 | link | edit or delete | write reply 
소년에겐 용기를 소녀에겐 사랑을
  2004.05.21 04:02 신고 | link | edit or delete | write reply 
갑자기 이 말이 떠오릅니다.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하던 내일이다."
  2004.05.22 03:37 신고 | link | edit or delete | write reply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fanta
  2004.05.23 12:27 신고 | link | edit or delete | write reply 
그리고 보면 두목은 책 정말 맣ㄴ이읽으세니에ㅛ요ㅗ시네요

왕년의 독설가다운 면모를 여기저기서 뽐내시는구요 후..
  2004.05.23 17:12 신고 | link | edit or delete | write reply 
oo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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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의 오판
원로의 오판

좌옹 윤치호(1865~1945), 개화의 선구자이자 일본,중국,미국에 유학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지식인, 고종 때 외무협판을 지내고, 동생 윤치소와 함께 경성신문을 창간한 언론인, YMCA 원장, 그리고 훗날 연희전문 이사를 지낸 한국 기독교계의 거물.

그는 3.1 운동이 일어나기 전 독립협회와 대한자강회의 회장을 역임한 민족의 원로였다. 윤치호는 1883년부터 1943년 까지 60년 동안 자신이 겪은 일을 영문일기로 꼼꼼히 적었다.(국사편찬위원회, '윤치호 일기')

1919년 3월 1일, 그는 고종 황제 승하로 뒤숭숭해진 민심을 의식하며 지금의 종로 2가에 위치한 YMCA 건물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다. 달포 전, 육당 최남선이 찾아와 조선 독립을 위해 모종의 행동을 취하자는 권유를 뿌리친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독립을 원치 않아서가 아니라, 국부와 능력을 배양하지 않고서는 강대국들이 조선의 독립 따위를 아랑곳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육과 경제, 그것이 윤치호에게는 독립의 지름길이었다. 점심을 마친 윤치호는 갑자기 창문밖이 소란스러워짐을 느꼈다. 파고다 공원 쪽에서 만세소리가 빗발치고 시민들의 함성소리가 가득 밀려왔다. 소문으로 떠돌던 게 바로 저것이라고 직감했다.

"학생들과 시민들이 만세를 외치며 종로 광장 쪽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창문을 통해 눈에 들어왔다. 소년들은 모자와 손수건을 흔들었다. 이 순진한 젊은이들이 애국심이라는 미명하에 불을 보듯 뻔한 위험 속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보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곧바로 군인, 기마경찰, 형사, 헌병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시내 전체가 흥분의 도가니였다. 33인이 서명한 독립선언서는 매우 부실해 보였다."(김상태 편역, '윤치호 일기,1916~1943' 중 3월 1일자).

30분 전, 독립을 고하는 한용운의 개회사가 끝나자마자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대표들은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다.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문은 이미 전국에 배포된 상태였으며, 거리로 뛰쳐나온 시민들의 손에 곧 닥쳐올 고난의 징표처럼 쥐어져 있었다.

"오등은 자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차로서 세계만방에 고하여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서 자손만대에 고하야 민족자존의 권위를 영유케 하노라" 한없이 부실해 보였던 독립선언문은 그렇게 비장한 언어로 침략자를 꾸짖고 있었다.

기마경찰 앞에서 맨손으로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는 것은 무모하고 위험천만한 짓이었을게다. 윤치호는 3월 2일자 일기에서 학생들의 소요는 무단통치를 연장시킬 뿐이라고 적었다. "만약에 거리를 누비며 만세를 외쳐서 독립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남에게 종속된 국가나 민족은 하나도 없을것" 이라고 생각했다.

3월 3일, 고종의 운구 앞에서 잠깐 눈물이 비쳤다. 그러나 장례의식과 애도행렬이 갖춰 입은 의상이 너무 유치하게 느껴져서, 이런 상태로 독립을 운운하는 것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들었고, 급기야는 "대중 목욕탕 하나 운영하지 못하는 우리가 어떻게 현대국가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라는 회의감에 젖었다. 그는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 와의 인터뷰에서 3.1 운동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민족 원로의 오판이었다. 독립을 향한 지사들의 움직임은 국내외에서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으며, 3.1 운동이 다기화된 운동세력의 연합적 분출구였음을 윤치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춘원 이광수는 한달 앞서 일어난 동경 유학생 독립선언식을 성사시키려고 동경과 상해를 밀사처럼 뛰어다녔으며, 상해에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한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여 조선독립 호소문을 강대국 대표들에게 전달했다.

연해주와 만주에서는 중광단이라는 독립운동단체가 1919년 1월에 이미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미주의 이승만과 안창호는 독립결의서를 미국의 정치인들에게 배포했고, 국내에서는 기독교,천도교,불교계의 연합전선이 결성되었다.

독립선언문은 거사를 위해 점조직화된 학생들의 전국망을 따라 방방곡곡에 전달되었다. 그런데 윤치호는 이 사실을 몰랐다. "약자가 살 길은 힘을 기를 때까지 강자의 호감을 사는것" 임을 거듭 다짐해 보지만, 그는 여전히 "동포들의 고통에 머리가 지근지근 아프다"(3월 9일자) 독립에 이르는 길이 달렀던 것인가, 윤치호는 33인중 한 사람인 이승훈의 결단을 로맨티스트 혁명가의 말로 받아들였다.

"이천만이 단합하여 축기를 기약하고 통일의사를 발표하면, 당장 독립이 안 온다 해도 이것이 씨가 되어 열매를 거둘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이승훈의 말 처럼 3.1정신은 항일운동의 포자가 되어 한반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강자의 논리 속에서 국력을 기르기에는 일제의 압박이 너무 치밀했던 탓인지 윤치호는 창씨개명과 내선일체론을 '조선인 평등대우론' 으로 해석하기에 이르렀고, 1941년 총독부 중추원 고문직을 수락했다.

- 송호근 :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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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먼 옛날에도 사람들이 데모했다는데~

입장차이야 어떻든 지금의 우리에겐 소중한 과정들 이었을 것이다.

과거를 잊기만 하면 발전적인 현실을 가져올 수 있을까?

과연 힘없고 무능한 사람의 '소리'는 들을 가치가 없는 것일까?

현실에 맞는 선택과 결론을 내리고 움직이는 것만이 무조건 옳은것일까?

가장 밑바닥에서, 절박한 상황에서,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제한된 선택지가 주어진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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